[뉴스 더하기] 계엄의 기억…다시 오월

입력 2025.05.19 (19:39) 수정 2025.05.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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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네, 뉴스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 더 깊이 있게 나눠보고 새로운 내용을 더하는 '뉴스 더하기' 순서입니다.

지난주 12·3 비상계엄 위기 속 빛났던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재평가하는 연속기획 전해 드렸죠.

오늘 이 내용 취재한 이성각 기자와 자세한 이야기 더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키워드로 내용을 정리해 주실 텐데, 첫 번째 키워드부터 보겠습니다.

'화분 물받침'인데, 5·18과 '화분 물받침',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기자]

네, 언론사마다 매년 5·18 기획을 미리 고민하는데요.

저 역시 올해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이 '화분 물받침' 때문에 이번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5·18 전문가인 정수만 전 유족회장이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그날 밤에, 자신의 5·18 자료를 담은 외장 하드를 숨긴 곳이 바로 '화분 물받침'입니다.

12월 3일 밤 광주의 많은 사람들은 그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됐던 5·18을 떠올렸던 거고, 계엄군이 집에 들어올 경우에 5·18 자료를 안전한 곳에 숨긴다고 생각하고 그게 바로 안 쓰는 화분의 물받침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만큼 12·3 계엄 당시 느꼈을 광주 사람들의 공포, 아픔, 그리고 대처가 달랐고, 이런 5·18의 역사와 정신이 이번 비상계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기획을 시작한 겁니다.

[앵커]

네, 그렇군요.

사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많은 분들이 80년 5월 광주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이성각 기자 보도 쭉 보면서 봤는데, 5·18과 12·3 비상계엄 정말 '판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이 닮았더라고요.

[기자]

네, 5·18 기록 영상 살펴봤고, 12·3 비상계엄 장면들 맞춰보면서 아, 정말 많이 닮았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의 국회 난입이 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국회 봉쇄 장면, 또 형식적인 국무회의, 정치활동 금지 내용이 담은 포고령 내용 같은 경우는 거의 같았고요.

특히 계엄군을 국회로 실어나르던 헬기 장면.

이것은 5·18 때 헬기 사격을 목격했던 광주 사람들한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앵커]

네, 그래서 아마 그날 밤 광주 시민들의 공포가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키워드 보겠습니다.

'수습위원회'인데, 5·18 당시에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여했던 위원회 이름 아닌가요?

[기자]

네, 맞습니다.

앞서 12·3 당시 광주의 공포도 달랐다고 말씀드렸는데 대처도 달랐습니다.

저는 그날 밤 광주시청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주목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광주시와 시의회, 구청장뿐 아니라 시민사회와 종교계 대표들도 참석했습니다.

이렇게 신속하게 민간이 참여하는 연석회의를 연 것은 전국에서 유일했습니다.

이게 45년 전 5·18 당시 각계각층이 참여했던 시국위원회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앵커]

네, 광주 시민들은 두려웠지만 대처도 더 빨랐군요.

다음 키워드도 보겠습니다.

'그날 밤 나라면...'인데, 여기서 말하는 그날 밤은 아마 지난해 12월 3일 밤, 그러니까 비상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또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묻는 건가요?

[기자]

네, 그날 밤은 지난해 12월 3일이기도 하고요.

그 5·18 민주화 운동 최후 항쟁일인, 최후 항쟁 하루 전인 1980년 5월 26일 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18 당시 도청에 있던 시민들은 곧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청을 지켰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과 그 주변에서 17명이 사살됐고요.

280여 명이 연행됐습니다.

최후 항쟁의 이런 희생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떨치기 어려운 부채감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날 밤 나라면…'이라는 질문은 산 자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과 같은 겁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불의한 권력에 끝까지 저항했던 5월 정신이 이번 12·3 계엄 상황에서 참여와 실천으로 되살아났다고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앵커]

네, 아마 그 부채감이 많은 시민들의 저항과 또 참여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에도 또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신속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군인과 경찰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을 또 꼽았더라고요.

이 역시 5·18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요?

[기자]

네, 12·3 비상 계엄 당시 군인과 경찰의 소극적 임무 수행에는 여러 배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출동했던 군인들에게 상당히 부담이 됐다는 겁니다.

그런데 5·18 특별법, 그리고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이것들이 근거가 됐는데요.

실제로 이 법을 근거로 5·18 당시 계엄군 14명이 지난해 44년 만에 고발됐습니다.

[앵커]

음, 5·18의 영향이 참 많은 곳에 미친 것 같습니다.

마지막 키워드 보겠습니다.

한강 작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죠.

'소년이 온다'인데,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씁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아마 이 키워드를 가져오신 건 과거의 5·18이 현재 12·3 비상계엄 위기를 돕고 구한 게 아닌가, 이런 의미로 담아 오신 거죠?

[기자]

네, 맞습니다.

불의에 맞섰던 5월 정신이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이건 목숨을 내걸고 저항했던 1980년에 머물지 않고,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40여 년의 투쟁의 역사가 모두 포함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1988년 550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와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재판,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이런 모든 과정이 광주와 5·18을 기억하게 하는 투쟁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앵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다시 주목받고 있는 5월 정신, 잘 계승하는 게 중요할 텐데, 남아 있는 과제도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제가 남아 있나요?

[기자]

최근 5·18 기념재단이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7%가 5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돼야 된다고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5·18 왜곡, 폄훼가 여전하고, 12·3 비상계엄 같은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5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담겨야 된다는 겁니다.

또 인권위나 군 내부에서 5·18을 매개로 한 민주주의나 헌법 교육이 좀 강화돼야 된다, 이런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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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더하기] 계엄의 기억…다시 오월
    • 입력 2025-05-19 19:39:21
    • 수정2025-05-19 20:35:03
    뉴스7(광주)
[앵커]

네, 뉴스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 더 깊이 있게 나눠보고 새로운 내용을 더하는 '뉴스 더하기' 순서입니다.

지난주 12·3 비상계엄 위기 속 빛났던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재평가하는 연속기획 전해 드렸죠.

오늘 이 내용 취재한 이성각 기자와 자세한 이야기 더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키워드로 내용을 정리해 주실 텐데, 첫 번째 키워드부터 보겠습니다.

'화분 물받침'인데, 5·18과 '화분 물받침',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기자]

네, 언론사마다 매년 5·18 기획을 미리 고민하는데요.

저 역시 올해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이 '화분 물받침' 때문에 이번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5·18 전문가인 정수만 전 유족회장이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그날 밤에, 자신의 5·18 자료를 담은 외장 하드를 숨긴 곳이 바로 '화분 물받침'입니다.

12월 3일 밤 광주의 많은 사람들은 그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됐던 5·18을 떠올렸던 거고, 계엄군이 집에 들어올 경우에 5·18 자료를 안전한 곳에 숨긴다고 생각하고 그게 바로 안 쓰는 화분의 물받침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만큼 12·3 계엄 당시 느꼈을 광주 사람들의 공포, 아픔, 그리고 대처가 달랐고, 이런 5·18의 역사와 정신이 이번 비상계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기획을 시작한 겁니다.

[앵커]

네, 그렇군요.

사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많은 분들이 80년 5월 광주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이성각 기자 보도 쭉 보면서 봤는데, 5·18과 12·3 비상계엄 정말 '판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이 닮았더라고요.

[기자]

네, 5·18 기록 영상 살펴봤고, 12·3 비상계엄 장면들 맞춰보면서 아, 정말 많이 닮았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의 국회 난입이 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국회 봉쇄 장면, 또 형식적인 국무회의, 정치활동 금지 내용이 담은 포고령 내용 같은 경우는 거의 같았고요.

특히 계엄군을 국회로 실어나르던 헬기 장면.

이것은 5·18 때 헬기 사격을 목격했던 광주 사람들한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앵커]

네, 그래서 아마 그날 밤 광주 시민들의 공포가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키워드 보겠습니다.

'수습위원회'인데, 5·18 당시에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여했던 위원회 이름 아닌가요?

[기자]

네, 맞습니다.

앞서 12·3 당시 광주의 공포도 달랐다고 말씀드렸는데 대처도 달랐습니다.

저는 그날 밤 광주시청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주목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광주시와 시의회, 구청장뿐 아니라 시민사회와 종교계 대표들도 참석했습니다.

이렇게 신속하게 민간이 참여하는 연석회의를 연 것은 전국에서 유일했습니다.

이게 45년 전 5·18 당시 각계각층이 참여했던 시국위원회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앵커]

네, 광주 시민들은 두려웠지만 대처도 더 빨랐군요.

다음 키워드도 보겠습니다.

'그날 밤 나라면...'인데, 여기서 말하는 그날 밤은 아마 지난해 12월 3일 밤, 그러니까 비상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또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묻는 건가요?

[기자]

네, 그날 밤은 지난해 12월 3일이기도 하고요.

그 5·18 민주화 운동 최후 항쟁일인, 최후 항쟁 하루 전인 1980년 5월 26일 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18 당시 도청에 있던 시민들은 곧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청을 지켰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과 그 주변에서 17명이 사살됐고요.

280여 명이 연행됐습니다.

최후 항쟁의 이런 희생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떨치기 어려운 부채감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날 밤 나라면…'이라는 질문은 산 자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과 같은 겁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불의한 권력에 끝까지 저항했던 5월 정신이 이번 12·3 계엄 상황에서 참여와 실천으로 되살아났다고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앵커]

네, 아마 그 부채감이 많은 시민들의 저항과 또 참여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에도 또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신속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군인과 경찰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을 또 꼽았더라고요.

이 역시 5·18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요?

[기자]

네, 12·3 비상 계엄 당시 군인과 경찰의 소극적 임무 수행에는 여러 배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출동했던 군인들에게 상당히 부담이 됐다는 겁니다.

그런데 5·18 특별법, 그리고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이것들이 근거가 됐는데요.

실제로 이 법을 근거로 5·18 당시 계엄군 14명이 지난해 44년 만에 고발됐습니다.

[앵커]

음, 5·18의 영향이 참 많은 곳에 미친 것 같습니다.

마지막 키워드 보겠습니다.

한강 작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죠.

'소년이 온다'인데,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씁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아마 이 키워드를 가져오신 건 과거의 5·18이 현재 12·3 비상계엄 위기를 돕고 구한 게 아닌가, 이런 의미로 담아 오신 거죠?

[기자]

네, 맞습니다.

불의에 맞섰던 5월 정신이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이건 목숨을 내걸고 저항했던 1980년에 머물지 않고,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40여 년의 투쟁의 역사가 모두 포함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1988년 550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와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재판,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이런 모든 과정이 광주와 5·18을 기억하게 하는 투쟁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앵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다시 주목받고 있는 5월 정신, 잘 계승하는 게 중요할 텐데, 남아 있는 과제도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제가 남아 있나요?

[기자]

최근 5·18 기념재단이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7%가 5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돼야 된다고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5·18 왜곡, 폄훼가 여전하고, 12·3 비상계엄 같은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5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담겨야 된다는 겁니다.

또 인권위나 군 내부에서 5·18을 매개로 한 민주주의나 헌법 교육이 좀 강화돼야 된다, 이런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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